연합감리교회

  1. 감리교의 어원과 그 의미
감리교는 영어 – Methodist를 한문으로 번역한 말입니다. 그러나 원어 ‘메도디스트- Methodist’는 1729년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웨슬리 형제가 ‘Holy Club‘(神 聖會) 운동을 시작하면서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이 정기적으로 경건모임을 가지면서 규칙적이고 조직적인 성결운동에 집착하자 여러 가지 멸시와 조롱 섞인 별명들이 붙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규칙쟁이’ 라는 뜻의 메도디스트(Methodist)였습니다.
메도디스트라는 단어의 기원과 관련해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사실은 초기 웨슬리안들이 성결에 이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실천 행위와 방법, 그를 위한 노력에 치중했다는 점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다며 비난했지만, 성결 혹은 성화야말로 메도디스트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1. 감리교의 교리적 특징 (칼빈주의를 따르는 장로교와의 비교)
  • 철저히 구원 중심적인 웨슬리 신학은 ‘하나님 은총의 낙관주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신학은 어떻게 하면 바르게 구원받아 성결하게 살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실천적 영성을 강조한 결과 구원의 길 (The Way of Salvation)에 대한 기초를 다음과 같이 세웠습니다.
회개(repentance) →칭의(Justification) →신생(New Birth) → 성화(Sanctification) →기독자의 완전(Perfection in Christ)
  • 감리교 신학은 칭의(Justification) 뿐만 아니라 성화(Sanctification)를 강조합니다. 칼빈주의 역시 성화를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인간 편에서의 성결 노력을 지나치게 경계하여 초점은 언제나 칭의에 머물렀습니다. 물론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faith alone)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는 칼빈과 다를 바 없었지만 칭의 못지 않게 성화, 즉 ‘성결의 삶'(holy living)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달랐습니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gift)인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입기위하여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강조했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칭의)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성화)을 구분했습니다. 결국 웨슬리의 감리교 신학은 ‘오직 믿음만으로’라는 개신교적 대주제와 동시에 ‘성결의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카톨릭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 웨슬리 신학은 양극적 요소들을 아우르는 화해의 신학을 지향합니다. 웨슬리는 머리와 가슴, 자연과 은총, 의인과 성화, 믿음과 선행, 신학과 교회, 가톨릭주의와 개신교주의 등 모든 대립되는 요소들을 화해시키는 신학을 추구했습니다.
  • ‘사변형의 신학'(quadrilateral): 감리교 신학의 4가지 표준을 말합니다. 웨슬리는 성서(Scripture)와 전통(Tradition), 이성(Reason)과 경험(Experience)의 기준들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룰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감리교 신학은 성경의 우선성을 강조하여 가톨릭같이 전통과 교리를 절대화하려는 시도를 막고, 전통은 자칫 개신교의 뿌리 없음을 보완해줄 수 있고, 이성은 무분별한 열광 신비주의나 미신주의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고, 체험은 이성주의로 부터 뜨거운  가슴의 종교를 지지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감리교 신학은 우리가 빠질 수 있는 모든 극단에서 벗어나 중용과 조화, 일치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 웨슬리는 자신은 1725년 영국 국교회의 사제로 안수 받은 이후 결코 의도적으로 국교회를 떠나 독립된 교파를 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교단이 침체하고 부패했기에 ‘교회 안에서의 교회 갱신운동’을 하다 보니 감리교는 ‘저절로’ 생겨났던 것입니다.
  1. 감리교회의 발전
초대교회의 탄생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부터라고 본다면 감리교회의 시작은 존(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올더스게이트 집회에서 종교적 회심을 체험한 1738년 5월 24일로 볼 수 있습니다. (웨슬리 일기 참조) 목회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존 웨슬리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경건훈련을 받고 자랐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준재였습니다. 영국 성공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모교 옥스퍼드 대학 교수가 된 그는 동생 찰스와 함께 신성클럽(Holy Club)의 지도자가 되어 성경공부, 금식기도, 구제 등의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에 열심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그들의 경건생활이 얼마나 엄격하고 규칙적이었는지 ‘매소디스트'(Methodist: 규칙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도 없이 모든 신앙의 문제들을 이성적으로만 해결하려던 그의 영적 갈등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신대륙에 건설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원주민 선교사로 지금의 조지아 주, 사바나에 갔던 웨슬리는 크게 실패하여 영국으로 돌아왔고, 자신감을 잃은 채 심적 번민에 빠졌습니다. 이런 웨슬리에게 올더스게이트의 뜨거운 체험은 그를 다시 태어나게 했고 영국 사회에 성령의 불길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739 년 1월 1일, 웨슬리와 동료들은 런던의 페더레인(Fetter Lane)에서 기도회를 갖던 중 새벽 3시경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는 체험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웨슬리의 사역 중에서도 그의 설교는 단순하면서도 열정적이어서 회중들의 감정을 사로잡아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9년 웨슬리는 브리스톨(Bristol)시 외곽에 위치한 킹스우드(Kingswood) 광산촌에서 노동에 시달리는 광부들에게 처음으로 옥외설교를 하여 수많은 광부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18세기의 영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혁명으로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기업주에 의한 노동자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으며, 사치와 허영으로 사회악이 만연해 감옥마다 죄수들로 넘쳐 났습니다. 당시 귀족화된 영국교회는 이런 사회 현상은 외면한 채 신학적 논쟁만을 일삼으며 생명력을 잃은 무미건조한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이런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고자 노력했으나 영국국교회는 그에게 강단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떠나거나 분리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선포하며 시장이나 광산촌이나 어디든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이것이 감리교회 운동의 시작입니다.
웨슬리는 회심한 성도들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신도회(Society), 속회(Class meeting), 반(Band)을 조직하여 성경연구, 기도, 경건훈련, 구제활동에 힘쓰게 하였으며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여 도박, 음주, 마약 등 사회악을 조성하는 습관들을 철저히 금지시켰습니다. 웨슬리는 정부나 영국 교회가 외면한 사회의 소외계층에 큰 관심을 갖고 어린이 노동법, 노예매매, 극빈자들의 처우개선 등을 펼치면서, 아래로부터 피의 혁명 없이 영국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1744 년 웨슬리 형제와 4명의 성공회 성직자, 그리고 4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모여 처음으로 연회(Annual Conference)를 조직하였고, 이 연회 조직은 오늘까지 전 세계 감리교회의 기본조직이 되었습니다. 176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신도회를 조직하게 되자 웨슬리는 1769년 감리교회 교역자들을 미국에 파송하였습니다.
1784 년 성탄절, 볼티모어에서 첫 연회를 열어 웨슬리가 파송한 토마스 콕을 초대 감리사로 추대하고 순회설교자인 프랜시스 애즈버리를 첫 감독으로 선출하여 미국 감리교회가 태동하였습니다. 이것은 영국에서 태어난 감리교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감리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새로운 교단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국 감리교회는 이민자의 증가는 물론 지역의 벽을 넘어서는 개척시기를 따라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천막집회'(Camp Meeting)와 같은 생동력 넘치는 부흥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서부개척시대 감리교 교역자들은 ‘순회목사'(Circuit Rider)라 불렀는데 그들의 평균수명이 35세를 넘지 못한 것만 보아도 감리교인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얼마나 뜨겁고 희생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감리교회의 ‘천막집회'(Camp Meetings)는 개척민들의 영적성장과 삶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세기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의 열기를 타고 미국과 영국감리교회는 전 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감리교회를 전세계로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1885년 아펜젤러 내외가 첫 선교사로 한국에 온 이래 한국감리교회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감리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영적운동은 비록 교파는 달라도 세계 곳곳에 7천만 명 이상의 웨슬리안을 배출했습니다.
  1. 감리교회의 성례전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에 엠마오에 나타나신(눅 24:13-35)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빵을 떼며 그 분의 현존을 경험해 왔습니다. 빵을 떼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서로 나누는 유대 전통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그 분의 이름으로 모여서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행동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수단이었습니다. 교회가 제도화되어 가면서, 이 성찬의 관습은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적인 예식인 동시에 예배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카톨릭에서 성례 (Sacrament)는 성찬과 세례 외에 다섯 가지를 더하지만, 개신교는 오직 성찬과 세례 만을 성례로 인정하며 감리교회 역시 이 두 가지만을 성례로 받아들였습니다.
웨슬리는 주님의 만찬에 임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정기적인 성찬 의식을 통해 그 능력을 받으라고 권유했습니다.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는 죄에 대한 각성, 회개, 회심(conversion), 용서, 그리고 성화를 가능케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 웨슬리 자신도 일주일에 4-5번 정도 성찬을 받았고 그의 설교 “지속적인 성찬의 의무”(The Duty of Constant Communion)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성례전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례전 신학
 
초대교회에서 성례전에 사용했던 헬라어 단어는, 주로 ‘신비’(mystery)라고 번역되는 mysterion입니다. 이 단어 속에는, 하나님께서 성례전을 통해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드러내신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성례전에 쓰이는 라틴어 단어는 sacramentum으로, ‘서원’이나 ‘약속’의 의미를 가집니다. 성례전은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교회가 계승한 것입니다.특히 세례식과 성만찬은 우리가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혜의 도구입니다. 세례식은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이요,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과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성만찬은 구원을 향한 여정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줍니다.
Open Table: 감리교의 성만찬식은 세례를 받지 않는 자들이라도 누구든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자발적으로 성찬을 받기 위해서 나오는 자들에게 성찬을 베풀고 있습니다.
  1. 감리교 교리의 핵심인 성화와 기독교인의 완전
감리교회의 신앙전통에 있어서 성화(sanctification)와 기독자의 완전(perfection)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것들은 웨슬리 구원론의 핵심입니다. 웨슬리는 구원의 출발은 의롭다하심과 믿음으로 시작되지만, 구원의 완성은 믿음과 사랑의 행함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구원의 출발이 칭의라면 구원의 완성은 완전입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전을 향해 날마다 변화와 성장을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는 성화의 과정(gradual process) 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롭다고 인정받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결한 자아로 변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The Way of Salvation and the Means of Grace
웨슬리는 구원의 단계를 영적인 여정이라는 큰 그림을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막힘없는 교제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이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구원의 여정은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로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1.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 선행적 은혜는 웨슬리의 교리의 특징으로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임하셔서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을 갖게 해 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선행적 은혜는 모든 인간에게 골고루 임하고 있는 우주적인 은혜(Universal Grace)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영적 여정을 집에 ㅂ     비유한다면, 회개는 그 집의 현관에 도달한 것과 같습니다.
  1. 칭의 은총(Justifying Grace): 우리가 하나님의 의롭다 여겨주시는 은혜를 깨닫게 될 때에 회심을 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삶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며 죄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준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의롭다하시는 은혜는 영적인 집의 대문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집 안으로 초청되었으며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1. 성화 은총 (Sanctifying grace)”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는 새생명(New Birth)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성화은총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로부터성화의 은혜를 통해서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점 더 깊이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의롭다하시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것이라면, 성화의 은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화의 은혜는 영혼의 집 안으로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1. 우리가 계속해서 성화되어 가면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회개와 은혜를 통해서 자라가야 한다. 이렇게 자라가면서 구제와 선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를 통해서 긍극적으로는 사랑안에서 온전 (perfect in love: 요일 4:7-19)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이 우리안에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온전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는 이것을 온전한 성화라고 불렀는데 다른 말로 한다면 믿음의 성숙함, 혹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1. 웨슬리는 우리가 성화되어 가면서Christian perfection(완전) 에 이르게 되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지 우리의 영적인 여정이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죽은 이후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화(glorified)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은혜 가운데 자라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웨 슬리는 특히 성화의 교리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과 차이를 보입니다. 루터와 칼빈은 죽기 전에 온전한 성화는 불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웨슬리는 죽기 전에 완전한 의인화와 성화의 회복이 가능하고 믿었습니다. 루터와 칼빈과는 달리 웨슬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웨슬리가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이유는 바로 은총의 낙관적인 견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죄악성보다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총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의 목표는 완전입니다. 온전히 성화(entire sanctification)된 상태가 바로 완전(perfection)입니다. 이 온전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어느 시점에 순간적으로, 하지만 동시에 점진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웨슬리는 깨달았습니다. 웨슬리의 성화론의 특징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영적 성장의 전 과정이기에 일생동안 영적 성장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웨슬리는 영성훈련을 위해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을 강조했습니다. 은혜의 수단으로서 성경읽기, 금식, 기도, 선행의 실천 등을 사용할 것을 웨슬리는 강조합니다. 특별히 성찬을 부지런히 받을 것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감리교인들이 미국의 정치와 경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웨슬리 목사님의 실천 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웨슬리 목사님 형제는 옥스퍼드대학 시절에도 ‘신성클럽'(Holy Club)을 이끌며 규칙적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양로원이나 고아원, 형무소, 병원 등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감리교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는 거듭난 성도들로 하여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교육, 의료, 고아시설, 빈민구제, 어린이 보호 등에 열정을 다해 힘쓰게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중요한 질문'(The Important Question)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방문하고, 눈 먼 자에게 눈이 되어주며,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웨슬리가 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웨 슬리의 사회적 성화 개념은 죄악으로부터의 성결과 사랑으로 정의됩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신 예수님은 오히려 세상 속으로 찾아가셔서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감리교인들이 사회에 사랑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감리교회가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머무르는 것으로부터 섬김으로서의 사회적 성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유는 바로 성화와 완전의 교리 때문입니다. 이는 감리교회의 정체성이자 독특한 교리입니다.
(위의 강의 내용은 연합감리교회의 홍보 책자 및 웹사이트, ‘웨슬리와 메소디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에서 발췌하여 정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