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월06일2020년 토요일 아침묵상
오늘 말씀은 신명기 28:25~35절입니다. 생명의 삶 편집부는 ‘패배와 불행이 그치는 길은 말씀 순종뿐입니다’ 으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말씀의 내용을 보시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백성에게 닥칠 불행들에 대해서 신명기 말씀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25절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26절 “(너가 죽게되면) 네 시체가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을 것이며” 27절 “(여러가지 병에 걸리고) 치유받지 못할 것이며” 28절 “미치는 것과 눈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29절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30절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31절 “소를 목전에서 잡았으나 먹지 못할 것이며 나귀를 뺏겨도 찾지 못할 것이며 도와줄 자가 없으 것이며” 32절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33절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네 소산을) 먹고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34절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35절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다 어마어마한 저주, 심판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옳습니다. 잘 생각해봐야 된다는 의미는 성경을 볼때 각자 하나님을 믿어오신 시간들이 어떤 분에게는 10년, 어떤 분에게는 30년, 50년..90년까지 있으실 것입니다. 각자가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설교말씀, 본인 스스로 읽었던 성경책, 그리고 혹 읽게 되셨을 기독교 신앙서적들 혹은 주석집 등 여러가지 말씀을 듣고 읽고 하셨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본인이 살아오셨던 삶의 순간에서 겪으셨던 경험들 그리고 성경외의 다른 책들, 강의들, 역사적 사건들, 개인의 경험들 이 모든 것이 합해져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관을 형성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말씀을 보아도 똑같은 신앙관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 다른 각자 각자 여러가지 모습에서 다양하게 차이나는 신앙관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만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 안에도 다양한 소리, 입장, 신학 그리고 신앙관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전적으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읽어야되는 이유가 본인이 선호하는 특정 본문들, 어떤 특정 성경뿐만 아니라 전체를 읽어야 거기에서 균형잡힌 건강한 신앙관, 신학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교회가 필요하고 성경교사가 필요하고 영적 지도가, 교회라는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신앙관과 신학관이 한 쪽으로 치우치기 쉬울때 그것을 바로잡아줄 지도자가 필요하고 동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에서는 성서, 전통, 이성, 체험 이 네가지를 강조합니다. 성경을 먼저 알아야되고 더불어서 전통,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여러가지 기독교 사상사나 기독교의 교회사와 같은 것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에서는 우리가 실패를 발견하게 되고 또 성공이나 좋은 모범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이성입니다. 감리교도들은 이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직 신학이나 여러가지 교회사 같은 신학의 항목들이 있는 것입니다. 체험도 중요합니다. 체험 없는 신앙은 그저 사변적인 논리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에 신앙적 체험 ,영적인 체험 뿐만 아니라 역사적 체험 그리고 내가 어떤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될때 성경에 대한 눈이 새롭게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네가지를 강조합니다.
그런 가운데 균형적인 신앙관이 생기는데 달리 말하면 신학적 사고 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는 관점입니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그리고 깊은 사고가 생기고 건강한 인생관, 신앙관이 생깁니다. 성경에 있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가 있고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만 갖고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말씀을 단편적으로 해석해버리면 폐하고, 흩어지고, 사람이 죽게되고, 병들고의 여러가지 불행이 나옵니다. 불행이 닥치는 한가지 예로만 얘기해보십시다. 27절에 종기, 치질, 괴혈병, 피부병 등 오늘날로 얘기하면 암이나 불치병일 수 있는 병에 걸렸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예수님 시대때에는 병에 걸리면 항상 저사람 혹은 저 부모님이나 형제가 죄를 지어서 병에 걸린걸로 해석을 했습니다. 누구 죄때문이냐고 묻는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불행이 닥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버리면 이런 패턴의 신앙적 사고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또 우리가 사는 지역에도 가정에도 병에 걸렸다면 그 사람이 항상 모든 상황에서 그 병이 죄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욥기와 시편에 여러가지 고백들이 있습니다. 욥이 죄때문에 모든 불행들을 당하였습니까? 성경에서 욥기가 말뚝처럼 박혀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를 알수 없는 의인의 고난에 대해서 성경이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종합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이 닥칠때 오늘 신명기 말씀처럼 자기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살펴보는 reflection, 반성적 사고로 바라보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 말씀을 나에게 적용해서 그런 일이 닥쳤을때 혹 내가 그러지 않았는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불순종의 측면은 없었는지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종합적 사고를 하면서 자기의 반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건강한 신앙의 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욥이 그랬고, 시편에서 나오는 다윗의 고백이나 다른 여러 시편 기자의 고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 말씀을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사용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말씀하습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지 말고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마 7:3, 눅 6:41). 건강한 기독교 신앙인의 신앙관은 남을 정죄하는데 이런 말씀을 판단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는 반성의 근거로써 봐야된다는 것입니다.
53쪽 말씀에 고영완님의 글이 있습니다. ’40일을 금식했는데 아내분이 죽었습니다. 또 아장아장 최고로 귀여웠을 아들마저 만 세살에 천국에 갔습니다.’ 아내도 잃고 아들도 잃은 이 분이 죄를 지어서 그랬겠습니까. ”장애가 있는 자녀를 낳았습니다’ ‘교회 부도가 났습니다’ ‘내 자녀가 죽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인애가 넘치는 분이시다.’ 이런 고백은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이 고백을 하기까지 고영완님은 얼마나 많은 눈물의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심에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또 다른 사랑이다.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이것도 하기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험난한 광야의 시간과 어둠의 골짜기의 시간을 눈물로 씨름하면서 통과한 후에 하는 고백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데려가셨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나를 향한 사랑과 인내를 포기하신 것은 아니다. 고난을 겪고서도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다. 이 땅에서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은 전지하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날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잘 지킨다면 우리는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와 평안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과 선하신 그분의 성품을 믿는다.’ 정말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이 분의 신앙의 성숙성과 깊이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분에게 남을 정죄하는 판단을 적용해서 당신이 죄를 많이 져서 당신 아내와 아이가 죽었나보다 라고 판단해서 안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신앙인이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에 앞서는 이가 아니고, 자기를 반성하고 reflection하고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믿음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말씀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반성하고 나를 돌이켜보고 더 거룩해지는데 더 주님을 닮아가는데 사용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여러가지 불행과 아픔을 당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흑인 형제 자매들의 눈물과 탄식과 부르짖음이 있고 또 많은 가족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린 이들의 눈물과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주여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믿음의 길, 반성의 길, 성화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