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월22일2020년 금요일 아침묵상
오늘 말씀은 신명기 22:1~12절입니다. 생명의 삶에서의 제목은 ‘언약 백성이 실현할 이웃 사랑과 창조 질서’입니다.
1절 ”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2절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또는 네가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려줄지니” 3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형제가 잃어버린 어떤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4절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 지니라”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는 ‘못 본 체 하지 말고’ 입니다. 못 본 체 하는 이유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 우선은 귀챦아서 혹은 시간도 내야 하고 힘도 써야 하고 신경도 써야 하고 등의 이유로 못 본 체 하게 됩니다. 그런데 못 본 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27쪽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을 요구합니다. 소극적인 규정을 넘어서 형제가 잃어 버린 가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라고 명령합니다.’
126쪽의 설명입니다. ‘ 이 계명들은 나와 상관없는 일에 휘말라지 않으려고 못 본 체 하는 사람의 본성에 역행합니다. 진정한 형제의 사랑은 이러한 본성을 거들러, 손해를 감수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 후에 여러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5절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6절 말씀에 “길을 가다가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 새가 그의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보거든 그 어미 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절 “어미는 반드시 놓아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되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8절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9절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10절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 하여 갈지 말며” 겨리하여 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영어 번역을 보시면 “Do not plow with an ox and a donkey yoked together” 멍에라는 옛날에 밭 갈때 지었던 것을 소와 나귀와 같이 하면 힘도 다르고 다리 길이도 다르니 욕심 내어서 전혀 다른 종류의 두 마리를 동시에 일하도록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11절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이 것도 한 종류의 실로만 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2절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126쪽 설명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보존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혼합을 금하시고 백성의 겉옷 네 귀에 술을 달도록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조 세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내가 실천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요?’
말씀의 뜻을 좀 더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가 혼합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concern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나 욕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취해버리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8절에 난간 비용 즉 안전 비용을 아껴서 사람을 죽는 일이 없도록 욕심으로 취하지 말고 배려하라고 말씀하시고, 혼합하지 말라 말씀하시고, 욕심때문에 두 소와 나귀를 함께 일하게 하지 말아라 말씀하십니다. 12절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옷술을 다는 일이 있겠지만 우리 기독교 인들이 옷술을 만들어서 달아 입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말씀 가운데 말씀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127쪽에 이훈이라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작은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 인들을 만났습니다. 남이 입던 옷들을 곳곳에서 받아 깨끗하게 손질한 후 알뜰 시장을 열어 팔고, 팔 수 없는 옷들은 퀼트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그래도 남은 조각은 걸레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차는 카풀이 될때만 사용하고, 자전거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Ten Thousand Village 라는 상점도 운영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부족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제값 받고 팔아 주는 일을 했습니다. 판매 수익금은 부족 마을이 자립하는 데 쓰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모두 자원 봉사로 하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그들 대부분은 20~30대 때 선교사나 자원 봉사자로 가난한 지역에서 몇 년씩 사역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 마음속에 지구촌 모든 족속이 가족처럼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읽어보니까 mennonite 교단 얘기하는 겁니다. 그 전에 교회에서 사진으로 넥타이로 카펫을 만들고 책을 잘라서 다시 팔고 퀼트를 만들고 청바지를 잘라서 카펫이나 이불을 만들고 하는 것을 보여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Ten thousand Village 같은 경우는 가난한 나라에 기술을 가르쳐 주고 원재료를 대어 줘서 좋은 예술 작품을 만들면 그것을 가져다가 미국이나 전 세계에서 그것을 팔아서 그 판매 수익금을 다시 그 마을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Fair Trade를 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있어서 저도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마음이 채워져 우리가 만나고 알게 되는 사람들을 그분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아닐까요? 이런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사는 삶 아닐까요? 꼭 여유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근에 저에게 주신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사람들을 기도 제목을 가지고 누가 이 세상에서 지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을 눈물 흘리게 하는 사건들 일까를 묵상하면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적어봤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아파하실 만한 일들을 말입니다. 그러면서 세계 뉴스에 주목하게 되고 어느날 소예배실에 앉아서 종이 다섯장 정도에 거쳐서 쓰게 되었습니다. 그 모두를 쓰고 나니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요즘 설교를 하면서 혹은 찬송을 부르면서 때때로 울컥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잘 와닿지 않았던 사건의 이야기들이 하나님 은혜 가운데 들려오고 깨달아지면서 아직도 할 수 없고 하지못하는 안타까움이 있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에 대해서 함께 조금이나마 마음에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분들은 저보다 훨씬 더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그런 일들을 마음으로 느낄 뿐만 아니라 뭔가 이미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만나고 알게 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런 삶이 우리 가운데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귀챦아하고 못 본 체 하는 것을 넘어서서 나의 탐욕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배려하고 돕고 섬기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로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 또한 감사합니다. 병과 싸우고 있는 성도들, 치료 받고 또 치료 받아야 될 성도들, 병원에서 확인해야 되는 성도들 주님 다 아시지요?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로 붙잡아 주옵소서. 오늘도 코로나 사태 가운데서 여러가지 마음에 힘겨움을 겪는 많은 이들 가운데 함께 하시고 전세계의 고통 울부짖음 거기에 귀 기울이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나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