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08 2020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 말씀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계획을 넘어서 하나님의 신령하신 계획 가운데서 우리의 삶이 인도되어지기를 원하옵니다. 주여 이 새벽에도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감정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여 그 말씀이 우리를 움직이시고 우리를 이끄시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때 우리의 마음이 강팍해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닫혀지지않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열려 주님의 말씀앞에서 다르게 반응했던 두 부류의 사람 가운데 다윗처럼 자기의 가슴을 치며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 주님의 제자들처럼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 참되고 바른 길을 쫓아갈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길 원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 마가복음 14장32절로 42절까지 말씀입니다.  생명의 삶에서는 제목을 ‘내 뜻을 내려놓는 절대 순종의 기도’라고 잡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는 세가지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첫번째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여기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대속 사건을 앞두고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 오늘 보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정말로 특별하게도 주님과 함께 공생의 삶을 살았던 제자들에게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33절에 보시면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절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이런 얘기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본인의 연약하고 아픈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사람들인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님의 마음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 슬프면 슬프다 고민이 되면 고민이 된다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고 있습니다. 인종,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와 불안감과 염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할때 그런 마음을 얘기하는 것 괜챦습니다. 여기 주님도 오늘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겠되었다” 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그런 자기 감정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고, 어른들에게도 자기의 감정이나 두려움이나 불안감이나 슬픔이나 염려에 대해서 말로 얘기하는 것 괜챦습니다. 그래도 여기 오늘 아침에 주목하기를 원하는 것은 주님이 그런 마음의 상태였었을때 두그룹의 제자로 나뉘어져 보입니다. 먼저는 주님께서 나머지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32절 하반부에 보시면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절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34절에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두부류의 사람이 있는거죠. 하나는 주님께서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부탁하신 그룹의 제자들이 있고, 두번째 그룹은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으라 하시고 그들에게만 주님의 마음을 토로하십니다. 그러자 아시는 대로 주님이 깨어 있으라고 부탁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37절에 보면 주님이 기도하고 돌아오시니 제자들이 잤습니다. 그러니깐 주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에 말씀하시죠.  37절 “..시몬아 네가 자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베드로만 잔 것이 아니고 요한과 야고보도 옆에서 잤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특별히 지정해서 물으십니다. “시몬아 네가 자느냐 네가 한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하나님 앞에 가서 그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보셨더니 40절에 보니 그들이 잤습니다.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제목으로 기도하신 후에 세번째 다시 와서 보니 여전히 그들이 그 상태였던 거죠. 그러니깐 주님이 이제 말씀하십니다. 41절 “이제 자고 쉬라” 여러분 때때로 우리는 지금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서 가족들끼리 물리적은 공간안에서 계속 같이 있지않습니까? 물리적은 공간에 같이 계속 있는다고 해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가까운 것이 아니죠.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나와 마음이 함께하면 마음이 통하면 그 사람이 가까운 사람입니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자고 해도 남남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도 남남인 부부가 있고, 한 집에 살아도 남남인 부모와 자녀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한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입니까? 몸과 몸이 물리적 공간안에 같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서로의 마음을 알고 함께 서로의 마음을 느끼며 함께 그 마음을 나눠 가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 고난 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또한 고난의 시간 광야의 시간에 지금 들어가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때에 중요한 것은 함께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함께 마음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번째로 오늘 말씀을 보시면 주님께서 그 유명한 솔직한 기도를 하시죠. 36절 ”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주님께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를 세번 하셨습니다. 한번 해서는 주님의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셔서 같은 기도를 세번 하신 다음에 마침내 마음의 준비가 되셔서 주님께서 십자가의 사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시고 그 발걸음을 내디시는 기도의 마지막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이 이 기도를 하셨을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두려워 하셔서 이러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간절히 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을 때도 혹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사지가 찢겨 죽기도 하고 여러 모습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님처럼 떨지않았습니다. 육체적 고난의 강도로만 보면 훨씬 더 강한 고난에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주님이 마음에 두려워하시면서 슬퍼하시면서 기도하십니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쓴 잔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랬습니다. 그냥 단순한 육체적인 고통의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가장 예수님이 고민하시고 슬퍼하신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대신 다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것이 그렇다면 그 아래에 있는 심리적인 것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인기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읍니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나오면 환호합니다. 정치인 후보나 대선 후보가 나오면 거기에 붙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면 막 붙습니다. 그러다가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이 안되면 많은 사람들이 언제 그랬느냐듯이 다 떠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때 예수님은 군중을 몰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 하시는 사역에 환호하고 박수치고 예수님이 이루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먹고 병자가 낫고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군중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인기의 덧없음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환호했던 그들이 여러분 아시다시피 종려주일에 환영했던 그들이 그들의 소리보다 더 커졌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시간이 지나자 예수님을 거절하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예수님을 모욕을 주며 예수님에게 수치를 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배신을 하였지요. 집단적 비난이 있었습니다. 집단적으로 그들은 소리쳤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주님을 조롱했습니다. 주님을 모욕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아무것도 없이 벗겨지신채로 그냥 그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코로나 사태 가운데 한 유럽의 국가에 나라 전체에 알려져 있는 작가 두사람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확산되기 전에 시골로 피했습니다. 본인의 안전이 염려되어 피한것 까지는 괜챦았습니다. 그러나 시골에 가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하면서 올리는 글이라고 올려서 많은 그 나라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자기의 안전을 피한 것은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피할수 없는 수많은 그 나라의 사람들이 볼때 그 얘기를 듣고 공분을 일으켜 집단적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한 여자 연예인은 어떻습니까. 이번 사태에서 정부가 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했나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많은 네티즌들이 오히려 그 연예인에 대해서 공분을 해서 여러 비난을 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비난을 견디지 못해서 연예인을 그만두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지 정확히 알수 없읍니다만, 때로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잘못을 해서 집단적 비난을 받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수님 같은 경우는 잘못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했던 조금 더 생각했으면 그런 글을 안올렸으면 되는데 조금 더 사려깊지 못한 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던 유럽의 두 유명한 작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이 땅에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배려하시고 아끼시고 그들을 선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냐. 주님을 매몰차게 버리고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모함하고 주님을 비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대했습니까. 제사장과 율법사와 서기관들은 주님을 아주 잔인하게 mean 하게 harsh하게 대했습니다. 그 주님을 고문하고 조롱하고 침뱉고 따귀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아프셨던 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간 것이지요. 그런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어땠습니까.

세번째로, 그러나 주님이 결단하시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알링턴 한인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고난주간을 겪으면서 우리의 인생에도 때때로는 고난이 올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도 더불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있는 말씀처럼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그 가운데서 이뤄가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영어찬양 “Hymn of Promise”의 가사를 보시면 참 좋습니다. 겨울안에 봄이 있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소망이 있고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고 죽음 이후에 영생이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던 예수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던 주님의 끝이 어땠습니까? 고난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십자가로 끝나지 아니하고 십자가 뒤에 영광이 있었고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 뒤에 있는 십자가가 보이시죠.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 배너에 황금 십자가와 하얀색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때때로 우리에겐 삶의 고난이 있습니다. 아픔도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고난뒤에 영광이 있으며 고난뒤에 승리가 있으며 고난뒤에 부활이 있으며 또한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이 기간이 시작되면서 처음 말씀을 드리고 설교했던 것처럼 어둠의 시간이 깊어지면 반드시 빛나는 별이 더 잘 보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어려움의 시간에 주님을 바라보시고 예수님 처럼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소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이 세상을 살면서 오해를 받고 모함을 받고 비난을 받고 거절을 받고 배신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이 우리 마음 아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회복과 용서와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만나지는 못하지만 인터넷 기술로 말미암아 서로 함께 한 자리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함께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고난주간 주님 세번째 수요일을 맞이하여서 이렇게 주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주님이 어려우실때 나는 어떤 그룹의 사람입니까. 그저 거기에 앉아있으라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따라오고 여기서 깨어서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와 함께 기도해주라고 부탁을 받을만한 사람입니까. 주님 나는 그 부탁을 받고 잠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깨어서 함께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주님 오늘 이 순간에도 아버지 하나님 의사분들이 죽어 나가고 간호사분들이 죽어 나가고 이제는 Grocery worker도 죽어 나가고 하나님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죽어 나가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편안하게 집안에서 우리의 안전을 확보하고 이렇게 편안히 기도하고 편안히 함께 말씀보고 있을때 나는 매일 매일 먹고 살아야겟기에 아버지 하나님 날마다 우체국에 나가는 직원들 사람들 섬기기위해서 이 어려운 때에 Grocery에 나가는 이들 아버지 하나님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수거하기 위해서 날마다 돌아다녀야되는 환경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들 하나님께서 그런 모든 분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옳은 자와 함께 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옳은 자의 눈물을 보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은 오늘도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던 주님은 그 고통과 슬픔과 번민 가운에서 기도하셨던 주님은 이 세상에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이 경험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때때로는 모함과 비난과 고소와 조롱과 무시와 천대와 엎신여김을 받고 아버지 하나님 때로는 수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가 부족하여 그런 것이오니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또한 우리의 형제의, 우리의 이웃의, 아버지 하나님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주님의 그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을 핍박하고 자기 욕심에 따라서 한 때는 주님께 붙었다가 시간이 지나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우리 안에 언제나 나도 그럴수 있음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진실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사랑과 온유와 자비와 용서로 사람을 대할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고 진실로 진실로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그 뜻이 이뤄질때  죽음이 죽음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죽음뒤에 부활있으며 십자가 고난뒤에 부활과 영광이 있음을 믿기에 그 가운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나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각자 그 자리에서 주님께 기도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나가기를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