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월20일2020년 목요일 아침묵상
오늘 말씀은 로마서 12:1~8절입니다. 생명의 삶에서 잡은 제목은 ‘거룩한 삶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 입니다.
여러분 모두 잘 아시는 유명한 말씀이죠.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 말씀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으로 너희를 권한다 라고만 얘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근거해서 너희를 권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율법은 마치 해야만 하는 당위처럼 많은 유대인들에게 느껴진 것이죠. 당위로 출발했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있어서의 율법의 기능은 당위가 아니고, 구원을 받아야 되는 조건으로써의 행함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비하심, 긍휼, 은혜 때문에 권함을 받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죠.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에 더 나아가야 되는 삶의 방향이라고 하는 것이죠. 두번째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얘기합니다. 너의 생각만 아니라 너의 몸이에요. 우리의 삶의 전체, 우리의 손,발, 우리의 모든 생각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의 의지, 신체까지도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려라 즉, 하나님 앞에 삶으로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설명을 합니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가고 워낙 많이 들은 말씀이라 쉽게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많이 생각해야 될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라. 그런데 그렇게 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여론과 사회적 분위기와 흐름에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도 어떤 사회적 이슈가 생길때 어떤 사람들이 많이 따라하게 되면 여론에 따라서 사람들이 바뀌기도 합니다. 깊은 사고와 숙고와 자기 판단에 근거해서 자기 입장이 아주 확실한 사람을 빼고는 여론의 영향을 받습니다. 심지어 자기 입장이 확실한 사람조차도 여론이 절대 다수의 사람으로 한 방향으로 완전히 넘어가면 그 사람의 입장이 바뀔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수의 소리가 이기기 때문이죠. 전체적인 분위기가 압도하기 때문이죠. 그러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을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본받지 않기위해서 해야 될 것, 또 이 세대의 분위기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인데 그 흘러가는 이 세대의 흐름에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 말씀처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서 보실때 선한 것, 기뻐하실 만한 것,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데 힘써야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숙고, 사고력, 반성력( reflection) 이 필요한 것이죠.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스스로를 높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의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Do not think of yourself more highly than you ought” 겸손하게 생각하고 그 겸손한 가운데에서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것이죠. 잘 듣고 잘 판단하고 잘 결정해야 되겠습니다.
4절부터 8절까지는 몸의 기능과 지체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에서도 한 몸된 교회와 지체된 교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4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절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예언…” 7~8절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다 다르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때 어떤 은사는 더 커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가 다 지체가 된 것이고, 그 지체의 분량대로 섬겨야 된다, 믿음의 분량대로 섬겨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114쪽 해설에 이런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삶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그분의 초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이 세대를 거슬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살아 내는 예배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닌 것 같지만 자기 중심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겠지요. 또한 ‘내게 주신 선물로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알고 그 은사로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섬김의 원리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쓰신 글의 일부가 115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을 기뻐하십니다. 찬양 예배에 참석해 뜨거워지는 정서적인 경험을 하지만 삶에서 주님께 기꺼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대신 그분을 이용하는 셈입니다’ 이분은 이용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저는 이것이 이용하는 것까지는 아닐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생각해야될 것은 있습니다. UMC 안수과정에서 꼭 묻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 안에 신앙생활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긍휼과 자비의 사역 플러스 정의와 평화의 사역이 있느냐를 반드시 묻습니다. 예배의 감격을 넘어서서 교회가 이웃을 향한 긍휼과 자비가 있느냐 그런데 긍휼과 자비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정의와 평화의 사역이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죠. 감리교는 개인의 성화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신앙의 사적 영역에 머무르는 개인적인 신앙의 감동에 머무르는 개인의 성화나 신앙적 만족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성화, 사회에 대한 책무, 시민사회 구성원으로서 교회가 처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신앙인의 책임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그것을 실제로 추구했습니다.
계속해서 팀 켈러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예배가 없는 윤리적인 행위나, 온 삶을 드리는 순정이 빠진 채 감격에만 겨워 드리는 찬양은 참다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살면서 자신의 생각, 의지와 감정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바른길을 가야 합니다. ‘ 성경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시면, 성경 안에는 은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말씀도 있지만, 구약 성경에는 예언자들의 예언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분량에 따라 소 예언서와 대 예언서로 나뉘는데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정의, 이웃 사랑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정의를 내어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내어버리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계속해서 말씀하시죠. 왜냐면 하나님은 약자를 더 품으시고, 고아와 과부를 더 품으시고, 억압 받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사랑 플러스 이웃 사랑이 우리 삶 가운데 은혜와 긍휼의 사역을 넘어서 정의와 평화의 사역까지 나아가는 책임 있는 교회와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각자 거한 처소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을 봅니다. 주님 기억하여 주셔서 우리가 정말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영적 제사로 드리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이든지 간에 믿음의 분량대로 교만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위해 사회를 위해서 기꺼이 주님이 주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바라보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뜻을 이루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그러한 신앙인 교회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