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월09일2020년 화요일 아침묵상
오늘 말씀은 신명기 29:1~9절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저는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로 잡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압땅에 이르렀을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새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하셨던 역사에 대해서 상기시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호렙산, 신의 산의서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던 하나님께서는 모압땅을 앞두고 다시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상기시킴으로 그들의 신앙이 강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너희가 애굽 땅에서 일어났던 모든 큰 이적과 기적들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았다.” (2-3절의 설명) 3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4절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어마어마한 긴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눈으로 보았더라도 그 기적과 이적 너머에 있는 혹은 그 안에 있는 의미를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보는 눈이 있어야 되고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들어도 듣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경험하여도 깨닫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가 필요한 것입니다.
5절 말씀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6절 말씀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는 하나님이신데 바로 너의 하나님이시다. 파티도 못하고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하심은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인줄 알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김기석 목사님께서 69쪽에 쓰신 내용 입니다. ‘당신은 자녀 세대에게 들려줄 신앙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가. 예수 믿었더니 모든게 잘되더라는 이야기 말고,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해 분투하고 고생하고 손해 본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두시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생각해보면 번영의 복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었더니 모든 것이 잘되더라. 그런데 번영의 복은 굳이 기독교가 아니어도 괜챦습니다. 왜냐면 다른 종교에도 그런 얘기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 뿐인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가 만사형통하고, 복받고, 부귀 영화를 누리고, 자식들이 잘되고, 모든 것이 잘되기 원합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잘되고 편안하고 모든지 만사형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인간의 심리에 부합되는 것이 번영 복음입니다. 미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변질된 복음이라고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위의 김기석 목사님 말씀으로 돌아가면, 예수 믿었더니 모든게 다 잘되더라만이 믿음이 좋은것이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교회 다니고 모든게 잘되면 믿음이 좋은 것이다. 교회를 다니시는 어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교회를 다니고 모든 것이 잘되면 믿음이 좋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고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는 분은 믿음이 안좋은 것입니까? 교회를 다니는 장로님이 있는데 자녀나 부인이 아프거나 부자가 아니라면 그 분이 믿음이 안좋은 것인 걸까요? 교회를 다니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의 삶에 연단이 계속 있다면 그 분은 믿음이 안좋은 걸까요? 생각해 봐야될 문제입니다. 성경안에 거기에 대한 반증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이 좋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앞부분에는 우리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이지만 끝까지 읽어 보시면 뒷부분에는 그 믿음 때문에 고난 당한 사람들, 불행을 당한 사람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 핍박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예수님 스스로가 우리에게 증거자 아니십니까? 예수님 만큼 믿음 좋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은 십자가 아니었습니까? 물론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잘 나가던 유대 사회의 모든 권리를 내버리고 자기가 전에 귀하게 여겼던 것을 분토만도 못하게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가느라 숱한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까? 매를 몇 번이나 맞고 고난과 연단과 눈물의 빵을 먹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그 분들이야 말로 고난과 연단 가운데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뭔가 돈주고 살 수 없는 그들안에 있었던 생명의 빛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번영의 복음은 올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하나님 믿어서 잘 되는 번영에 대해서도 형통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반적이고 세상적인 종교가 얘기하는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과 길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에 의해서 말씀하십니다. 고난과 연단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이야기, 사도 바울과 제자들의 고난의 이야기, 그들이 감당하고 견디고 댓가를 지불했던 연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난은 당하고 임박한 고난이 있습니다. 나에게 갑자기 임한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다가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고난에는 자처한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제자들 처럼 복음을 위해서 댓가를 지불한 스스로가 자청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과 연단 너머에 무언가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 고난과 연단 자체를 좋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 고난 너머에, 그 댓가 지불한 연단 너머에 무언가 생명의 빛을 진리의 빛을 생명의 능력을 보고 느끼고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난 너머에 무언가를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의 선언이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다” 고난없이는 영광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이 참된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이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생명의 빛을 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빛을 마음으로 깨닫고 눈으로 보며 귀로 듣는 저희가 되게 하셔서 잘못된 복음을 쫓아가는 저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쫓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