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월28일2020년 화요일 아침묵상
신명기 11:1~12 말씀입니다. 생명의 삶 제목은 ‘구원자의 능력을 기억하고 항상 명령을 지키라’입니다.
1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계속 반복해서 모세를 통해서 또 성경 전체를 통해서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얘기할때 기독교는 유대교는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출발점이다 종착점이다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얘기합니다.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거죠. 아래에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2절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는 보았다) …하나님의 어떤 교훈과 위엄과 강한 손과 펴신 팔로” 3절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건져내셨는지 그리고 홍해물을 가르시고 광야에서 어떻게 너희들을 돌보셨는지 행하신 일 (4,5절의 설명) 여러가지 사건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7절 “이 모든 큰 일들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8절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9절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그러므로 하나님이 명하시는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명령을 지켜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하고 차지하고 장구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여기에서 애굽땅은 소위 말해 관계가 잘되어 있어서 물을 끌어다가 하는 것이고, 가나안 땅은 11절에 보면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애굽 땅은 하나님이 필요없는 땅입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이미 문명의 기술로 우리식을 따지면 상수도 하수도 이런 것들을 아주 잘해둬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굳이 필요가 없는 땅이고, 가나안 땅은 축복된 땅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돌보아주셔야 하는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인생이에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땅,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는 것이 필요한 상황, 그 상황은 어떻게 보면 좋은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없는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고난많고 고생많고 할때에는 기도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고생이 끝나고 자식이 잘되고 좋은 직장에 좋은 대학에 샐러리를 잘 받고 이제 삶이 안정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 기도할 꺼리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보시면, 신앙에서의 본질은 하나님 자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목적이 되시고, 사람을 사랑하고 돈을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데, 돈을 사랑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어릴때 돌보아 주셨습니다. 나중에 크면 아버지하고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없는 때가 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유산까지 다 줬습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오죽하면 자식들에게 다 주면 안된다는 가슴아프고 웃지 못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평생을 돌보셨는데 옛날 고려장이 있었듯이 더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가 쓸데가 없다는 일이 나오기도 하지요. 이런 비극적인 얘기에서 ‘효’가 더 강조되지 않았습니까.
나 이제 더이상 하나님이 필요없어. 하나님께 더이상 얻을게 없어. 예수님과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때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더 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고침을 받길 원했고 어떤 사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길 원했습니다. 다 예수님께 뭔가 원했습니다. 뭔가 얻기 위해서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주님이 갖고 있는 것이 보였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의도적으로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볼때 주님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만한 분이 더이상 아니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본질이 드러나고 그들의 신앙의 본질이 드러나지요. 우리 사람들은 이기적인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여호와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한테 얻을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낳고 그 인품은 소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연단된 그 인격과 인품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광야와 환란 가운데서도 감사한 것을 찾습니다. 감사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그 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삶이 완전히 달라지죠.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지난 십년전 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십니까? 지난 이십년전 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십니까?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하십니까? 여러분, 삼십년 사십년 오십년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요. 옛날에는 어르신들이 내가 하루 삼시세끼만 먹고 입에 풀칠을 할고 살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 세대들은 삼시세끼를 먹고 있습니다만 만족합니까? 불행하고 불만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옛날에 사람이 살기위한 필수품의 개수와 지금의 필수품의 개수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그렇게 많은 것을 가졌는데 만족합니까? 행복합니까?.. 불만족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거에요. 우리의 본성은 더 편안한 삶, 더 뭔가를 가지려고 하는 마음, 우리의 욕심과 탐욕은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과거 이십년 삼십년 전의 삶의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시는 참된 행복은 만족함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단순한 삶에 있습니다.
고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단련된 인격과 인품을 가지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오늘 하루를 감사와 행복으로 일궈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열어 감사가 보이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님만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